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카가 다카우지 (문단 편집) === 거병, 도주, 그리고 재기 ===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요시사다 토벌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 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렸다. 교토에서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를 내세우며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 고 모로야스군을 격파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면서 자신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해 12월에 요시사다를 하코네,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마침내 교토에 입성했다. 고다이고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입경의 기쁨도 얼마 되지 않아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오슈에 파견된 [[구게]](公家)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 앞서 가마쿠라에 유폐되어 죽음을 당한 모리요시 친왕의 처남이다.]와 가마쿠라 토벌 전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낸 명장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이를 공격하자 이들에게 완패, 다카우지는 교토를 버리고 [[규슈]]로 도망쳤다. 그러나 아카마츠 엔신을 비롯한 규슈 일대의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무사들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수습할 수 있었다. 또한 고곤 상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아 나름대로 명분을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덴노 계승은 조금 복잡했는데, 이른바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이라는 두 개의 황통이 존재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막부 때문에 이 두 황통이 10년간 로테이션으로 덴노직을 맡게 되어 있었다. 당시 덴노였던 고다이고는 다이가쿠지 계통이었고, 고곤 상황은 지묘인 계통.] 서부 무사들의 지원으로 재기에 성공한 다카우지는 다시 역공을 펼쳐 덴노 지지 무사들을 격파해 나갔고, 1336년 음력 4월에 최대의 적이었던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연합군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요시사다는 이때 살아서 도망쳤으나 마사시게는 이 전투에서 패해 자결했다. 그리고 이해 6월에 교토로 돌아왔고 고다이고는 또다시 히에이 산으로 쫓겨갔다. 덴노군에 타격을 입힌 다카우지는 히에이산으로 쫓겨간 고다이고에게 화의를 요구했고 고다이고도 이에 응해 3종 신기를 고곤 상황의 아들인 고묘 덴노에게 양도했으며, 이후 다카우지는 새로운 무가 정권을 선언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양도한 3종 신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요시노에 정주,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며 요시노에서 또 다른 조정을 수립했다. 이로써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